대금 배우기

12월의 국악인 - 하규일(河圭一)

대금잽이 2024. 12. 2. 16:09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 생몰연대 1867 ~ 1937
  • 출생지  서울
  • 전문분야 가곡

프로필

상세정보

근세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가곡 명창.
서울태생.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금하(琴下).
20세쯤에 삼촌 하중권(河仲權)의 제자 최수보에게 처음 가곡을 배웠으며, 박효관의 수제자로 대성해 〈가곡원류〉를 물려받았다.

30세가 넘어 1901년 한성부윤(漢城府尹) 겸 한성재판소 판사, 1909년 전라남도 독쇄관(督刷官), 1910년 전북 진안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다.
한일합병이 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상경해 음악에 전념했다.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學監)을 맡아 새세대들에게 한말의 국악교육에 힘썼는데, 1930년대부터는 정악이 교과과정에 삽입되면서 임기준과 함께 시조·가곡·가사를 가르쳤다.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의 향기(鄕妓) 출신들을 모아 다동(茶洞)에 조선정악전습소의 분실인 다동조합을 차려 여악분교실장(女樂分校室長)을 지내면서 여악들에게 시조·가곡·가사를 전수했다.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심해져 기생조합을 일본식 교방의 이름인 권번(卷番)으로 바꾸게 되자 1924년 다동조합도 조선권번으로 개칭했다.
1926년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취임해 가곡·가사·시조를 전수했다.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아악부의 젊은 연주직과 아악생에게 가곡을 가르친 것은 다시없는 보람된 업적이다. 하규일을 아악부에 초빙하기로 된 배경에 대해서 함화진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악원(掌樂院)은 원래 음악과 무용만을 교습하였을 뿐이요, 가요는 악장(樂章)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일 궁중에서 가요가 필요할 때에는 민간의 가객(歌客)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 때는 궁중에서도 가요가 그렇게 필요치는 않았다. 그러나 근 천여 년 간 전통적 고전가요(古典歌謠)가 폐지하게 됨은 너무도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 민간에서도 시대사조(時代思潮)에 따라 이것을 연구하는 이가 전연 없고 선생층(先生層)으로는 다만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씨 한 사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규일씨는 이왕직(李王職) 촉탁(囑託)에 임명되어 고전가요를 교수하게 되어 아악생뿐 아니라 전 직원에게까지 가곡·가사·시조를 가르쳤다."
(<국악 50년 회고사(國樂50年回顧史)> 중에서),

1928년 빅타레코드사에서 그의 가곡 전판을 취입했고, 1931년 가곡집 〈가인필휴 歌人必携〉를 펴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하규일 전창의 노래에는 남창(男唱) 가곡 89곡, 여창(女唱) 가곡 71곡, 가사 8곡, 시조(중허리시조·평시조·지름시조) 등이 있다.
제자로는 이병성·이주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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