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배우기

녹성 선생님을 추모하며

대금잽이 2023. 5. 13. 00:37

녹성 선생님을 추모하며

아래의 글은 제가 4330년 2월에 써서 회지에 실었던 글을 옮긴 것입니다.

 

 

나는 이제껏 대금을 배우면서 꽤 여러 분의 선생님을 모셨다. 잠깐 배우다 만 선생님도 있고 1년 이상 지도를 받은 분도 있으나 그 중에 참된 음악가의 길을 제시해 주신 스승은 녹성 김성진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대금을 배웠으되 가락을 전수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미 선생님께선 연로하셨고 수업 시간에도 늘 말씀하시길 세세한 부분은 젊은 선생들에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당신께선 주로 전체적인 흐름만 잡아 주셨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어느 젊은 선생 못지않게 열성적으로 지도해 주셨고, 대금의 기교를 배우는 걸 떠나서 선생님의 인생은 그 자체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선생께선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 것으로 나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신 것이었다.

 

2월 1일은 선생님의 기일이다. 나는 생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음에도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을뿐더러 임종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선생님께 배우던 지난날들을 떠올려 그 가르침을 가슴에 되새겨 보고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어 위대한 예술가의 삶으로 거울삼고자 한다.

 

김성진 선생님은 우리음악계의 거목이시며 또한 대금의 독보적 존재로 대금 정악의 연주와 교육에 혼자 꿋꿋하게 한평생 매진하셨으니, 1919년 이왕직 아악부가 개설되고 1955년 아악사 양성소가 새로 만들어지기 전까지 모두 26명의 대금 전공자를 배출해 내었지만 오직 선생님 한 분만이 외롭게 이 길을 지키셨으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중견 연주자의 대부분이 정악에 관한 한 모두 선생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대금 정악의 맥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대금이란 악기를 우리들 모두가 이렇게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님의 공이며, 정악의 여러 악기들 중 유일하게(이 글을 쓴 4330년 당시) 대금 정악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보더라도 선생의 음악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평생 소식(小食)에다 청렴하고 과묵하며 겸손한 삶을 사셨는데, 하루하루를 오로지 속이 빈 대금과 같이 욕심을 버리고 지내셨으며 저녁에는 맑은 술 한 병이면 족하여 일생을 낡은 집에서 사셨으니 범부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삶을 재조명해 보고 음악적 여정을 돌이켜 보는 것은 꼭 그 분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대금을 연마하는 모든 후학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며, 굳이 전공자뿐 아니라 취미로 대금을 배우는 분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될 터이다.

 

 

예용해 저 [인간문화재](1963년)

 

…전략… 김씨가 대금을 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울 태생, 편모슬하에서 상급학교에 갈 수 없어 관비가 지급된다는 아악부 양성소 4기생으로 입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작 꿈 많은 문학 소년이었다. 밤하늘을 우러러 별을 보기를 좋아했다. 별 가운데서도 두드러지게 보이는 별보다는 희미한 별에 더 정이 갔다. 그 때 녹성(綠星)이라고 자호하여 오늘까지 바꾸지 않고 있다. 동화, 동시가 신문에 당선되곤 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하략…

 

 

성경린 저 [김성진의 대금]

 

대금의 명공으로 근조선 고종때 장악원 악공 정약대, 최학봉 등의 이름이 전해 오고, 내려와 왜정 때 죽농 김계선이 또한 아악부 아악수로 저문(著聞)하였다.

정약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0년을 하루 같이 인왕산에 올라 정진한 대가였고, 최학봉은 김계선의 사장(師匠)으로 더욱 높임을 받은 명금이었다.

 

김계선은 가위 출남(出藍)의 악재였던 듯 정약대, 최학봉과 능히 비례하는 명수로 떠 들렸으니 장하다. 김계선 이전에 김계선 없고 김계선 이후에 김계선 없을 것이라는 평이 별로 지나친 칭찬이 아니었던 것을 그를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김계선은 뒷날 아악부에 이부 되었으나, 원래는 주전원 장례원 내취로, 그 세악 내취에 속하여 대금을 전공하였다. 당시 대금의 김계선 하면 모르는 이가 없고 라디오 방송으로 레코드로 그의 명성은 천하에 떨치었다.

…중략…

김성진이 아악부에 입소할 때가 1931년 4월, 2개년의 교양과목이 끝나고 전공에 벨러 대금을 배울 때, 그의 범사는 제1기 출신의 박창균, 제2기 출신의 김천룡이 당하였고, 영좌로 노악사 유의석이 아직도 건재하였다.

박창균, 김천룡은 이미 아악수장에 승격하고, 악생의 교도는 아악사와 아악수장 이상의 책무에 속하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김계선의 기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아악수에 불과한 신분으로는 후배 지도의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김성진의 대금으로의 대성에 그래도 김계선의 영향을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김성진이 졸업 후 주로 김계선에 사사해 열심히 탁마했기 때문이다.

김성진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명금 김계선의 서거 후요,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8·15의 조국 광복 후였다.

김계선은 1944년 여름, 해방을 얼마 앞두고 타계하였는데, 그때 서울 중앙방송국이 매달 정해 놓고 방송한 그의 대금독주는 들을 만한 값진 곡목에 속하였는데, 이것이 약관 김성진에게 승계된 것이요, 8·15 이후는 국악의 성수기를 맞아 그의 정진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김성진은 다소 허약한 체질이라 꿋꿋한 정력적인 연주가는 아닐지라도, 그만큼 섬세하고 유연한 기교파라 할 수 있고, 문학적인 교양은 더욱 그의 연주를 내면적 깊이 있는 것에로 침전시킨 좋은 소지가 되었다고 보아진다.

 

만만한 적수가 아니던 선배 또는 동배의 같은 차비를 물리치고, 홀로 그가 각광을 받을 뿐 아니라 정악대금의 정통을 이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타고난 자질, 그 음악성에 물어야 할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요, 무척 겸허한 사람이다. 발발한 야심으로 일가를 기필한 것도 아니요, 근근자자히 면려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명장이 된 그런 연주가의 한 사람이다.

일수나 명수가 버릇처럼 지니는 오기나 만심은 그에게 도저히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그가 이날까지 간고한 인생을 편력하였다는 것, 일기아성(一氣阿成)의 악재가 아니요 어디까지나 노력으로 쟁취한 오랜 연륜과 수련의 덕일지도 모른다.

… 하략 …

 

 

조성래 저 [대금정악]

 … 전략 …

아악부에 귀한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김계선의 독주는 빼 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김성진)선생이 수업 시에는 녹음기가 아주 귀한 때라 그때마다 주옥같은 가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온몸으로 연주를 듣고 곧바로 집에 가서 연습해 보고는 하였다. 그래도 잘되지 않은 가락은 그다음 날 곧바로 선생님을 찾아가 물어보고 해서 배웠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경성 방송국에서는 매달 전통음악 시간을 정해 놓고, 고정 프로그램인 김계선의 대금 독주를 생방송하였는데 그때 동네 부잣집에는 드물게 라디오가 있어, 이를 자랑하려고 창문틀 같은 데다 걸어 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선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에 맞춰서 꼭 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배우고 싶었던지 한 번 들은 가락은 귀에 박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고 그 당시를 술회하셨다.

… 하략 …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91년 초에 내가 서울 음대에 대금 전공으로 입학하고 난 후였다.  사실 나는 그 전에 이미 선생님의 연주를 텔레비전이나 무대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는지라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국악(뿐 아니라 모든 음악) 프로그램이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려버리곤 했으나 어쩌다 대금 연주가 있으면 그 시간만큼은 꼭 지켜보곤 했는데, 이는 뭐 내가 음악을 알아서가 아니라 단지 대금의 그 청아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듯한 음색에 반한 것이 첫째 이유였고 또한 여러 연주가 중에서도 김성진 선생님이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연주 자태와 연륜에서 풍겨 나오는 뭔지 모를 경외감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챦게 직접 대금을 만지게 되고 여러 대금잽이들이 대부분 선생님의 제자라는 사실과 그 어른의 인품을 전해 들으면서 큰 감명을 받았으며, 나도 꼭 한 번 지도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기에 음대로 진학해서 전공 지도 교수로 선생님을 신청하게 된 것이었다.

 

첫 수업이 있던 날, 나는 전날 있었던 신입생 환영회의 술기운이 채 깨지도 않은 상태여서 악기도 안 가지고 그냥 인사나 드릴 생각으로 국악원에 갔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께선 벌써 당신의 악기와 악보는 물론 내가 쓸 보면대와 방석까지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그날뿐만 아니라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항상 선생님께선 아침부터 미리 수업 준비를 해 놓으시고 제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으니, 어쩌다 연습을 게을리하고 수업에 임했을 때는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연로하신 이후로 수업이 있는 날마다 각 학교를 찾아다니시기가 힘들어 모든 강사직을 그만두셨는데 대체 강사를 구하지 못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서울대학의 제자 3명이었다. 그나마 학생들을 국악원으로 불러서 수업을 한다고 항상 미안해하시니 불성실한 제자로선 당신의 제자 사랑과 성실하심에 도무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당연히 선생님께선 수업에 빠지는 일이 없으셨지만 어쩌다 피치 못할 일로 수업을 못하게 될 땐 미리 연락을 주시는 것은 물론 수제자이면서 국악원 수석으로 있는 김응서 선생에게 대신 수업을 맡기셔서 제자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

 

처음 선생님께 수업을 받을 땐 80이 가까운 연세도 그렇거니와 워낙 나 같은 풋내기는 감히 마주 뵙기도 힘든 대선생이시라 어찌나 어려운지 대금을 불면서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말씀을 하시는데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정말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였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곧 익숙해진 데다 선생님의 인자하신 성품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선생님께선 친할아버지와 같이 자상한 면이 많으셔서 어쩌다 수업 전에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실 때면 과자나 떡을 사 오시기도 하셨는데 동료 학생들은 나를 보고 아저씨라고 부를 망정 선생님의 눈에는 역시 어린 손자뻘로밖에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선생님께선 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다고 하여 늘 최서방이라고 부르셨는데, 손자뻘밖에 안 되는 내게도 하대를 하시되 함부로 반말을 하시는 법이 없이 항상 상대방을 존중해서 말씀하셨다. 수업 중에 '이 부분은 이렇게 해야 하는데, 너는 …'이라고 말씀하시다가 곧 '아 참, '너'래, 미안하네'라고 하실 정도였다.

 

설날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출발하면서 전화를 드렸더니 다른 제자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대낮인데도 선생님께선 이미 얼큰히 취해 계셨다. 서울대학교에서 선생님 댁이 있는 비원 옆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나마 길을 몰라 30분 정도를 더 소비하게 되었다.

이리 저리 헤맨 끝에 드디어 선생님 댁 근처에 이르게 되었는데, 추운 날씨에 선생님께서 골목 어귀에 나와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학교에서 전화를 드렸을 때 선생님께선 근처에 와서 전화를 하는 것으로 잘못 들으시고 내가 길을 잘 못 찾을까 봐 그 때부터 나와 기다리신 거였다.

 

선생님께선 젊은 시절부터 애주가이셔서 매일 술을 드시다시피 했는데 말년에는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저녁 무렵에 전화를 드리면 이미 만취 상태로 말씀도 잘 못하시곤 했다. 20대에 청주 한 병에 대취하여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명기를 잃어버린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고 하신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많이 드셨던 모양이다.

 

선생님께선 술뿐만 아니라 담배도 무척 즐기신 까닭에 한 시간의 수업 중에도 담배생각이 간절하신 듯하여 권하여 드리면 굳이 마다하시고 수업 시간을 꼭 채운 다음에야 한 대를 맛나게 태우곤 하시었는데 특이한 점은 입술의 감각을 잃지 않으시려고 항상 입 가쪽으로만 담배를 물고 피시는 것이었다.

 

손수 지었다는 종로구 원서동 산 중턱의 두 칸짜리 구옥에서 평생을 지내셨는데, 항상 방문을 열면 앞에 내려다보이는 비원을 가리키시며 '저기가 바로 우리 집 앞마당이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상당히 운치 있는 표현으로 생각하였으나 막상 그 집에 가 보니 서울 한가운데 그런 판잣집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고 볼품없는 낡은 집이었다.

 

선생님께선 항상 식사는 반 공기 정도로 적게 드셨으며 연주가 있는 날이면 저녁 식사를 하시지 않으셨다. 기운이 없어 어떻게 연주를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면 '배에 음식이 들어 있으면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악기는 참으로 형편없는 것으로 모양도 볼품없을 뿐 아니라 대의 두께도 얇고 음정도 잘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나마 말년에는 악기의 수명이 다 되었는지 소리도 잘 안 났다.

원래 선배로부터 물려받았던 명기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잃어버리고 당시 쓰시던 악기는 50여 년 전에 어떤 노인에게 평조회상의 악보를 만들어 주고 얻은 대를 재료로 선배에게 거금을 주고 부탁하여 만든 것이었다.

음정이나 음색은 물론 모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흠도 없이 완벽한 대금만 찾는 요즘 연주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볼품없는 악기를 50년이 넘도록 써 오시는 동안 땀과 손때에 절어 검붉은 빛을 띤 그 대금은 선생님의 분신과 같은 것으로 다른 사람은 도저히 그 악기로 그와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체구도 작으신 데다 체질도 그리 강건한 편이 아니었으나 팔순을 바라보던 당시에도 대금 소리가 그렇게 쩌렁쩌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꼭 소리가 커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 음 하나 하나에 혼과 기가 담겨 있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고나 할까, 수업 중에 잠깐씩 불어 주실 때도 온 몸의 힘을 다하셨는데 정말 선생님의 몸 속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짜내듯이 모아서 연주하시는 게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음악의 5음은 오색 때때옷과 같은 게야. 다섯 가지 색이 각각 개성이 강하고 화려한 것들이지만 한데 모았을 때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갖듯이 음악도 그런 어울림을 이루어야 하는 거지'

그래서인지 선생님께선 수업을 하실 때 세밀한 부분은 별로 지적을 하지 않으셨다. 지저분한 기교나 잔 가락은 빼고 간결하게 연주하며 그 음 하나 하나에 혼을 불어넣되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대금은 청이 생명이야, 너무 청소리가 안 나도 답답하지만 아무 데나 울면 촌스러워. 청이 제대로 붙어야 연주가 마음먹은 대로 멋지게 되지, 그런데 청을 평생에 3 번 잘 붙이기가 힘들거든'

 

'대금잽이 동기생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작고 힘도 약했지. 대금을 불려면 팔도 길어야 하고 기운도 세야쟎아? 그래 안 지려고 몇 배로 노력했어, 남들이 한 시간 불 때 나는 두 시간 세 시간씩 연습하곤 했지. 그러다 보니 오늘까지 오게 된 거야, 무슨 딴 비결이 있겠어'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 방송국에서 연주를 하게 되어 악기랑 가방을 들고 갔더니 손이 얼어 막상 연주를 하려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질 않쟎아. 그래 뻗는 부분은 더 길게 빼면서 한 손씩 내려 주무르고 해 가며 어찌 어찌 연주를 하긴 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 손에 쥐가 나서 연주할 때면 그게 불안하지'

 

'어디선가 홀연히 들린 듯도 하고, 기연 듯 미연 듯 가락의 끝자락을 감추는 신선의 경지를 탐하였지만 한 번도 그런 몰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어'

 

 

이렇듯 평생을 한 토막 대나무를 의지하여 이승을 하직하는 그날까지 오직 음악만 생각하며 성실하면서도 청렴하게 사셨으니 선생님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나 음악성은 물론, 고매한 인품은 이후의 어느 후학들도 따를 수 없는 것이라 큰 스승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또한 제자들에 대한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생전에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죄는 물론이고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매 그 크신 가르침의 만분지일도 따르지 못하고 있으니 못난 제자는 고개를 들 수 없을뿐더러 선생님 영전에 눈물로 속죄하고 싶은 심정이다.

 

저사랑국악회 =http://cafe.daum.net/daegumlove

 

대금동호회-저사랑

대금의 순우리말은 '저'입니다. '저사랑'은 대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금을 배우고 연주하며, 대금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대금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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