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배우기

6월의 국악인 - 신쾌동(申快童)

대금잽이 2024. 6. 3. 16:25

금헌(琴軒) 신쾌동(申快童)

  • 생몰연대 1910 ~ 1977
  • 출 생 지 전북 익산
  • 전문분야 거문고
 
- 1939 전북국악대회에서 수상
- 1954 대한국악원 이사로 취임
- 1958 제 1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 수상
- 1959 원각사에서 개인거문고 독주회를 가짐
- 1960 국악예술학교 거문고교사로 취임
- 1965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입단
- 1967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16호
          거문고산조 기능보유자로 지정됨. 5·16 민족상 국악부문 심사위원
- 1971 국악예술학교 교사 사직. 거문고산조 보존연구회 회장 취임
- 1977 현금곡전집(창명사) 출간. 별세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문고의 거장 신쾌동(申快童, 본명은 신복동, 1910∼1977). 거문고로 입신의 경지를 이룬 신쾌동의 거문고 향제줄풍류 가락과 거문고산조 그리고 독창적인 거문고병창은 한국음악사에 남았다. 신쾌동은 거문고 술대를 손에 낀데다 괘까지 움직이면서 음계를 내고 거기에 창을 하는 거문고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귀재로 알려졌다.

신쾌동 산조는 그 짜임새가 탄탄하고 거문고라는 악기 성격에 가장 잘 맞게 가락이 짜여져 있어 천박하지 않으면서 오장육부를 뒤집는 남자의 눈물과 슬픔이 느껴진다고들 말한다. 신쾌동류는 휘모리 자진모리 등이 남성적이고 힘이 들어 여성 연주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쾌동이 만들어 낸 가야금산조를 아는 사람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익산 삼기면 오룡리에서 태어난 신쾌동은 소리를 잘하고 풍류를 즐기던 아버지 신선조씨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부터 율(律)에 관심이 많았다. 9세에 정읍 출신의 박생순에게서 1년동안 양금을 배웠고 12세에 여산과 익산 부근에 살던 박학순에게서 가야금을 배워 그때 벌써 재동 소리를 들었다. 13세부터 15세까지는 다시 풍류의 여러 악기에 능통하였던 박생순에게서 단소와 대금을 익혔는데 후에 단소의 명인 전용선(전추산)에게 단소풍류와 산조가락을 배웠다.

거문고를 탈만한 연령인 15세에 이르자 신쾌동은 정일동 김용근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우게 된다. 처음으로 거문고를 배울 때는 무슨 맛인지 몰랐기 때문에 별로 취미가 없었으나 잊었던 거문고가락을 찾기 위해 40리나 떨어진 이리의 율계(律契)를 찾아가 그 율계의 10여명 회원과 함께 앉아 풍류합주를 한바탕 타고 돌아올 때면 거문고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율계 회원 중 금치선생이 신쾌동에게 금헌(琴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17세에 김소례씨와 결혼하고 이 무렵 부친이 충남 강경에 있는 당대의 명률(名律) 백낙준(1876∼1930)을 찾아가 아들에게 거문고산조를 가르쳐주도록 간청, 여산(現낭산면)의 심곡사에서 백낙준에게서 4년동안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이 때부터 신쾌동에게 거문고가락을 배우려고, 장단 한 번 맞추려고 신쾌동 집을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며, 이들은 신쾌동이 외출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기에서 신쾌동선생의 수제자 김영재교수(전남대)의 제자인 송영국교수(백제예술대)는 신쾌동선생에 대한 잘못된 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버지 신선조는 장님이 아니었고 집에 있던 수류탄이 터져서 팔을 잃고 한쪽 눈이 반실명상태가 됐다는 것. 신쾌동선생이 고창사람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덧붙인다. 익산사람 32명이 모여 만든 삼이계의 창립자이긴 하지만 고창 최초의 율계인 육이계(육례 중 두번째가 악이다는 뜻에서 칭함)의 창립자로서 당시 육이계 활동이 왕성했을뿐 아니라 신쾌동이 고창에서 3∼4년 머물렀던 것이 고창사람이라는 설을 낳았다는 것. 김제는 천석꾼 만석꾼이 많아서 사랑방이 너덧집에 그쳤지만 오천석꺼리의 중농민이 많은 고창지역은 사랑방 있는 집이 30가구 정도나 되고 예인을 우대하는 등 오랫동안 머물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고창에서 연을 맺은 백관수씨는 한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고 이 때 신쾌동선생을 서울로 데려 갔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조선성악연구회에 몸 담고 기악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동백명창에게서 적벽가를 배우고 송만갑 정정렬명창에게서 소리를 틈틈이 익혔는데 선생의 목구성이 좋아 서로 소리를 가르치려 했다고 전한다. 이 때 친분이 두터워진 임방울 명창의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서 21세 때 거문고산조를 처음 취입했다. 한편 빅타 OK레코드사에서는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명창들과 함께 소리반주를 거문고로 연주했다. 그 당시 레코드를 취입할 때 대금반주에는 진도출신 박종기명인이 맡았다.

이후 6·25를 전주에서 맞았던 신쾌동은 첫 연주회를 1953년 미국공보원에서, 1959년 두번째 거문고독주회를 원각사에서 가져 큰 호평을 받는다. 1957년 해방이후 처음으로 임방울명창과 한주환, 국립국악원의 김의연 등이 참가했고 춘향가와 거문고 독주 및 반주 등을 3개월동안 순회공연했던 재일교포 위문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선생은 광복 이후 최초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박소희 김소희 김월하 등 민간음악인들과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정진한다. 1964년 국악예술학교 재직 당시 아시아음악학회 초청으로 미국의 30여 대학교를 순회하여 대환영을 받았으며 이 때 지영희선생(1909∼1980)과 더불어 국립관현악단 창단에 힘을 모아 줄풍류합주를 지도했고 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고창을 잊지 못하고 자주 다녔던 선생은 담관암을 얻어 세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77년 11월 22일 끝내 정릉 댁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선생이 아꼈던 후학들은 선생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미사리조정장 가는 길)에 모시고 20년 뒤 선생을 뒤따라간 부인도 같이 모셨다.

97년 11월 25일, 신쾌동선생 서거 20주기 추모 연주회가 있던 이 날 저녁 선생의 부인은 공연을 보지 못하고 홀연히 숨을 거뒀다. 이 날 학술대회와 공연을 주관했던 문하생들은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빈소로 가서 선생 옆에 사모를 모셨다. 공연 수익금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2남 4녀 중 넷을 선생보다 먼저 보내고 혈육으로 아들 딸 한명씩이 있지만 60대의 누나가 온전치 못한 남동생을 거두고 있는 형편이기에 선생은 물론 부인의 마지막도 제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거문소의 기미에 민감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3-4일 뒤의 날씨를 예측할수 있을 정도였다는 거문고의 독보적인 거장 신쾌동. 그는 가난과 고독속에서 평생을 굴하지 않고 오직 율(律)을 위해 살다가 죽었다.

참고:데일리전북

거문고 산조
거문고산조는 20세기 말 거문고 연주가인 백낙준에 의하여 처음 연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즐기던 거문고를 가지고, 민속악인 산조를 연주한다고 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음악의 뛰어남으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백낙준의 거문고산조를 김종기(金宗基)·박석기(朴錫基:1899∼1952)·신쾌동(申快童:1910∼1977) 등이 이어 받았고, 박석기류는 한갑득(韓甲得:1919∼1987)이 이어받았으며, 한갑득류는 김윤덕(金允德:1918∼1978)이 이어 받았다. 현재 전하고 있는 거문고산조에는 신쾌동류·한갑득류·김윤덕류 등이 있다.

백낙준의 거문고산조는 전체적으로 계면조 중심으로 되어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우조로 된 가락이 많이 추가되었다.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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