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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국악인 - 최옥삼(崔玉三)

대금잽이 2024. 3. 5. 15:26

생몰연대  1905 ~1956

 

  • 출 생 지  전남 장흥

 

 

  • 전문분야  가야금

 

인물정보

최옥삼(崔玉三 1905-1956. 별명:최막동, 예명:최옥산)은 1905년 7월 25일 전남 장흥군 건산리 518번지에서 아버지 최창조와 어머니 임동례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서였는지 최막동으로도 불렸다. 그는 서당에 가지 않고 읍에 있는 예술전수소에 나가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을 배운지 몇 달 사이에 <영산회상> 전13장을 통달하게 되었고 가야금산조까지 익숙하게 연주했다. 그 후 당시 가야금 연주가로 첫손에 꼽히던 한성기(韓成基)가 그를 전문적으로 맡아 가르쳤으며 14살에는 소년가야금 연주가로 널리 알려졌다.
최옥삼은 13세 경 영암으로 가서 김창조에게 사사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가야금이며 기타 다른 국악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큰형인 최옥윤도 피리를 했고, 또 장흥의 촌로들이 그 집안을 “원래부터 풍각쟁이 집안이었어”라고 전하는 걸로 봐서 그의 집안내력이 그러한 환경을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옥삼은 처음에는 소리를 배웠으나 목이 나빠 산조로 돌렸다 한다.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이 최옥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최옥삼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제자인 함동정월(威洞處月)의 짧은 증언에 따르면, 최옥삼은 얼굴이 넓적하고 코가 납작했으며 성품은 정직하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당시는 스승을 대하는 것이 몹시 엄격해서 최옥삼은 새벽같이 일어나 스승의 긴 담뱃재와 타구, 요강 등을 깨끗이 비워놓고 배울 준비를 하곤 했다고 한다.
최옥삼의 가야금 연주는 무게 있고 섬세하면서 정서가 깊은 것이 특징이다. 농민출신이므로 농사일에 단련된 손이 크고, 매듭이 지고, 못이 박혀있었다. 그의 가야금 연주에는 철선악기의 음색을 방불케 하는 야무지고 탄력 있는 음향을 발산했으며 빠른 부분의 연주에도 아름다운 음향과 풍부한 여운이 있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가야금의 명 연주가였다.
최옥삼은 전국을 돌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군산, 원산, 마산, 광주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활동하고 청진, 함흥에도 가서 가야금을 가르쳤다. 그는 원래가 진실하고 기품이 있는 사람이어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정성스럽고 진실 되게 자신의 예술을 전했다고 한다. 또한 힘든 농사일, 나무 베는 일을 하면서 형님을 극진히 모셨다. 그는 키가 크고 체구도 큰 편이었으며, 실제로 좀 무뚝뚝했던지 '뚝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평양의 최승희(崔承喜) 무용연구소의 연주가로 있으면서 최승희를 위한 무용곡도 여럿 썼다고 한다. 또한 가야금, 대금, 단소, 아쟁과 타악기 등 여러 개 악기를 한꺼번에 앞에 놓고 모든 악기를 훌륭히 연주하여 절찬을 받기도 했다.
최옥삼은 국악관현악에 의한 무용극 음악을 처음으로 작곡하였는데 <반야월성>, <조선의 어머니>, <사도성 이야기>, <밝은 하늘아래> 등이 그의 대표작들이다. 특히, <사도성 이야기>를 비롯한 일부 무용극 창작에서는 노래를 적절하게 넣어 주인공의 내적 체험을 심오하게 표현하여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1925년에 스승 정운용의 소개로 목포음악양성소에서 교원으로 4년 간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비롯해서 1937년에는 원산음악양성소에서, 1942년에는 함흥음악양성소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1945년에는 평양국립무용극장에서, 그리고 1952년 이후에는 음악대학민족음악학부 겸임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전 생애를 통해 1,000여명의 제자를 양성했다고 한다. 또한, 일생을 농민들과 같이 생활했으므로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잘 알고 있었고 많은 민요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민족음악의 진미를 발견한 그는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음악작품은 민간대중들이 잘 알아듣도록 작곡되어야 하며 그들의 생활에 힘을 줄 수 있도록 창작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민간대중들이 좋아하는 민요를 기초로 작곡되었다. 또한 그는 모든 악기에 능통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기악 작품들에서 그는 각 악기의 특성과 기교들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나라가 있고서야 음악도 있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손수 악기를 만들어주고 악기 수리까지 해주는 등 제자들의 음악과 그 생활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최옥삼 명인은 1956년 3월 13일 사망하여 평양 용악산 밑에 묻혔다. 이것은 1990년 ‘평양범민족통일음악제’에 서울전통음악단의 일원으로 방북 했던 김정수(추계예술대학 교수)의 현지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최근 연변대학 음악과 교수인 남희철이 '최옥삼을 비롯한 28인이 북한의 주요한 민족음악가'라고 말해 그의 입지가 북한에서 얼마나 컸던 가를 알려주었다.

[kocca 문화콘텐츠닷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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