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
- 생몰연대 1916~2003
- 출 생 지 전북 부안
- 전문분야 가사.시조
1975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석암 정경태는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서 1916년 2월 7일 3백석의 지주 정종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사랑채에 독서당을 차려놓고 일가와 행세하는 집 아이들 교육에 힘쓰시던 아버지는 주산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곧 신학문쪽으로 공부를 돌리게 하였지만 사랑방에 출입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7세에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8세에 주산 보통학교에 입학, 9세에 나이봉 훈장에게 서예와 한문을, 12∼14세에 유학자 정도경으로부터 시문을 사사받고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그때 이미 정경태는 한시 250수와 50여 편의 작문을 지어 지니고 있었다. 며칠이면 다 외워버릴 책을 수개월 동안 하는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본격적인 서당공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5살이 되자 한 10리쯤 떨어진 이웃 마을인 돌무산의 진씨 집에 장가들어 재행(再行)을 가서 시회에 나가 장원을 하자 10살 위의 동서 김한술이 문장에는 졌지만 시조는 내가 잘할걸 하며 하객들 앞에서 부른 그 한 가락 시조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형용할 수 없는 소리에 감동되어 신방에서까지 외어 읊었다 한다.
열 살 위의 동서 김한술씨는 시조창과 인연을 맺게 한 첫 번째 스승이다. 신혼 초부터 시조에 재미를 부친 정경태는 레코드판을 닥치는 대로 모아 따라 부르고 시조하는 선생이 어디에 왔다는 소식을 듣기가 바쁘게 찾아가 뵙고 며칠이라도 가르침을 받거나 아예 집으로 모셔다 융숭한 대접을 베풀며 가르침을 청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 길로 한마을의 오성현으로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하고 고흥의 김춘경을 모셔다 더 배웠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도삼·오윤명으로부터는 상사별곡·처사가 등의 가사와 가곡을 배우고 하규일의 8가사와 가곡 남녀창 음반을 구입하여 혼자서 익혔다. 18세 되던 해에는 장성 백양사에서 지방의 명가 임재희로부터 가사를 사사하고, 2년 후에는 정읍에 살던 대금의 명인 죽민 전계문으로부터 가곡 여창을 사사하여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23세 되던 39년에는 방송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마침내 당대의 선가 두봉 이병성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때 정경태는 두봉으로부터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로 두봉의 예능을 빠르게 전수받았다. 곧 시와 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박헌봉과 어울렸고, 시조3장을 방송하기도 하였다. 두봉선생에게 12가사와 가곡을 모두 익히고 부안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2년 후에 그 시골로 내려 와 72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가사와 가곡을 다시 배워주고 그 후 3년 동안을 더욱 정진하였다. 또한 정경태는 어린시절부터 서화를 익힌데다 의재(毅齋) 허백련과 이당 김은호로부터 필법과 사군자를 배워 이 방면에도 출중한 솜씨를 가졌으며 장기와 바둑에도 뛰어나며 술서를 탐독, 음양학에도 재주를 보여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한편 가사·가곡·시조 등 모든 정가에 일가를 이룬 정경태는 1944년부터는 배우는 단계에서 가르치는 단계로 넘어와 있었다. 이때 송창섭, 김소란, 박향란, 김옥희에게는 가곡 여창을, 유종구, 고민순에게는 남창을 전수시켰다. 이리향제 줄풍류의 예능보유자 강낙승도 이 무렵부터 그에게 12가사와 가곡남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듬해에는 그동안 꾸준히 채보해 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창악보>를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전라북도 학무과에 초빙되어 도내 초중학교를 돌며 한글에 대하여 순회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안농고의 국어교사로 발탁되고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전주명륜대학의 전임강사로 초빙되었으며 6·25 후인 1951년에는 김제고교로 옮겼다가 53년에 전주고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전주고교 교사시절에는 특별활동반으로 국악반을 만들어 교사와 학생들에게 시조를 보급하고, 전주국악원 창립의 산파역을 맡는 한편 단소·대금·북가락·범패 등의 채보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스스로 춤·거문고·단소 등도 계속 배웠다. 그리고 1955년에는 10여 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채보하고 정리하여 온 국악보를 간행해 냈다. 이 악보는 18종의 악기연주법을 비롯하여 가사·가곡·시조는 물론 판소리·민요·단가·가야금병창 등에 이르기까지 국악의 주요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어 선구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고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 정경태는 풍류객으로 시조와 가사를 부르며 전국을 순유하여 ‘정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정경태는 이때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시조의 가락을 통일하였다. 경제·내포제·완제·영제·반영제·원제 등으로 각기 다른 가락을, 가사와 가곡을 배운 것을 밑거름으로, 반영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니 전국의 시조인들이 이를 석암제라 부르고 있다.
김천에서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 정경태는 `1961년 대한시우회를 결성, 1963년 대한시우회를 창설하였다. 정경태는 전국에 지부와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시조·가사·가곡을 보급, 국민개창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년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를 열고 있다. 1975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자 그 해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가사·가곡발표회를 가졌으며 이후 가사와 시조, 후학지도와 보급운동에 전념해 왔으며 1979년에는 국악계 원로들로 대한정악회를 창설, 회장직을 맡아 국악의 올바른 뿌리와 줄기를 찾아 그것을 계승 보급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그의 저작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가사보>를 비롯하여 <시조보>·<가곡보>·<조선창악보>·<아악보>·<국악보>·<가악보>·<증보주해시조보>·<시호록>·<금립시집직역본>·<고금천문학>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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