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배우기

손이 작아서 대금 불기 힘든 분

대금잽이 2023. 7. 21. 16:50

 

  손이 작아서 대금 불기 힘든 분 계십니까?

 

장훈 선생의 경우를 볼까요.

야구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장훈선생은 일본 야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고교시절에는 오사다하루(왕정치)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난 타격실력을 자랑했지만, 일찌감치 일본에 귀화한 오감독과 달리 장훈선생은 끝까지 한국인의 자존심을 꿋꿋이 지킨 덕분에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였지요.

 

하지만 장훈선생은 내내 따라다니는 차별과 괴롭힘 속에서도 전인미답의 3000 안타를 달성함으로써 야구의 신과 같은 위치에 올랐습니다.

얼마 전에 이치로가 장훈선생의 기록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양국의 출장경기 수가 다르고, 타자와의 대결을 회피하는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는 정면승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 만큼 안타를 칠 기회가 많은 것이지요.

그리고 또 빠른 발을 이용한 내야안타 등 단타가 많은 이치로와 달리 장훈선생은 홈런이 많은 거포형 타자입니다.

장훈선생도 300 도루를 기록할만큼 발이 빨랐으면서도 500 홈런을 넘어선 홈런타자였습니다.

3000 안타, 500 홈런, 300 도루를 달성한 선수는 140 년 역사의 미국야구에서도 윌리메이스가 유일할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이룩하신 것이지요.                

 

 장훈 선생의 위대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1940 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장훈 선생은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누나를 잃었으며, 선생역시 원자폭탄의 피폭자였습니다.

게다가 왼손 거포로 알려진 선생은 사실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습니다.

선생이 5 살 때에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부딪히면서 오른손이 불구덩이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 때의 화상으로 인해 선생의 오른손은 네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붙어 버렸고, 다른 손가락들도 제대로 구부리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중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는 공을 잡을 수 없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공을 던질 수 밖에 없었고, 배트를 쥐고 휘두를 때에도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왼손으로 야구를 하면서 겪은 고통은 아래 장훈선생의 증언을 보시지요.

 

  일단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보니 과연 불편한 오른손으로는 좀처럼 잘 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상대는 프로선수들, 실력 있는 투수들이니 말이에요. 고등학교까지는 그런 대로 잘 쳤는데, 프로가 되니 좀처럼 공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입단했던 도에이에 마쓰키 겐지로(松木謙治郞)씨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배팅 코치였는데, 그 사람도 왼손타자였고, 옛날에는 한신에서 리그 수위타자를 했던 사람이었죠. 그분이 저를 보시더니 「이래선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왼손타자가 배트를 잡고 풀 스윙을 하는데, 오른손의 힘이 약하면 배트가 아래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래쪽으로 회전이 걸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공에 드라이브가 걸리면서 멀리 가면 공이 뻗어나가지 않고 떨어져요. 그러나 오른손 힘이 강하면 배트가 반대로 위쪽으로 돌아가면서 공에도 위쪽으로 회전이 걸립니다. 공이 쭉쭉 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른손의 힘을 기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매일 오른손 한 손으로만 배트를 잡고 500번씩 공을 치는 연습을 했습니다. 마쓰키씨가 공을 툭 던져 올려주면 제가 치고, 또 던져 올려주면 치고….
 
  이걸 2주일 정도 하니까, 오른손이 안 올라가요. 이도 못 닦겠어. 아프지요. 오른쪽 근육이 약하니까. 아파서 밤에도 자지를 못하겠어요. 그래서 코치한테 아프다고 얘기했죠.
 
  그랬더니 「네가 약하니까 아픈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시키는 겁니다.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것을 믿고 했습니다.
 
  하루에 500개 배팅을 1년 정도 했습니다.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중일 때도, 또 끝났을 때도 쉬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있을 때는 경기 시작 전에 하기도 하고 경기를 마치고 하기도 하고…. 아마 처음 시즌이 끝나고 나서 12월부터 1년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하니까, 뻗어나가는 타구를 칠 수 있게 됐습니다 
  
  ―결국 연습으로 극복하셨다는 얘기군요. 이후 張선생님의 타법은 「廣角(광각)타법」으로 유명하십니다만, 어떻게 해서 그런 타법이 나온 겁니까. 
  
  일단 제대로 뻗어가는 타구를 치고 나니 그 다음은 기술이 문제가 됐습니다. 예를 들어 아웃코스를 바깥으로 밀어 치는 것은 조금만 기술 있는 선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웃코스를 잡아당겨서 왼손타자의 경우 1루 쪽으로 보내는 것은 상당히 힘듭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쪽으로, 인코스로 오는 공을 당겨 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인코스 공을 바깥 쪽으로 밀어 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걸 가능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하나의 포인트에서 두 방향으로 칠 수 있게 될 수는 없을까. 그걸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코치에게 말해보고, 지도를 받고, 몇 번이고 연습해서 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하루 이틀 해서 된 것은 아니고 5~6년 정도 걸렸습니다. 24세 정도에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후에 신문사들이 廣角타법이라든지 스프레이 타법이라든지 하는 닉네임을 붙여 준 것이지요 
  

 아래는 보너스로 차별에 맞서는 장훈선생의 일화입니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신 장훈 선생은 고교때부터 일본 제일의 구단인 요미우리로부터 입단제의를 받는 등 촉망 받는 야구선수였으나 한편으로 재일한국인이란 신분 때문에 늘 부당한 대우와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능력을 높이 산 일본인들에게 귀화를 권유 받았지만, 그 어머니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다른 사람이 저지른 후배 폭행 사건의 누명을 쓰고 제명당한 사건도 있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부와의 시비 도중 '닥쳐라, 죠센징'이라고 외치는 상대의 머리를 배트로 후려쳐 버렸다고도 합니다.

프로야구선수가 된 뒤에도 장훈선수가 출장하면 '김치나 먹어라' '한국으로 강제송환시켜라' 등의 야유가 터져 나왔는데, 장훈선수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분으로 언제든 상대가 부당한 차별을 하면 즉시 주먹을 날렸습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결승타점을 올리고 경기 수훈선수로 뽑힌 후  인터뷰에서 소감을 묻는 장내 아나운서의 질문에 장훈 선수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 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

경기장은 뒤집혔고... 일본관중들은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 장훈 선수는 너무나 당당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그라운드를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저사랑국악회 =http://cafe.daum.net/daegumlove

 

대금동호회-저사랑

대금의 순우리말은 '저'입니다. '저사랑'은 대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금을 배우고 연주하며, 대금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대금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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